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아틸라]]의 [[훈족]]과 [[아에티우스]] === 암군이었던 호노리우스 황제가 붕어한 423년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된 5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이미 방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를 [[반달족]], [[고트족]], 그리고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이 약탈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럼에도 서로마 제국은 여전히 막대한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었고, 게르만족들도 로마 제국에게 복속된 상태였다. 호노리우스 사후 [[요안네스]]가 스스로 황제임을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켰지만 제압당했고('''요안네스의 반란''') 원로원은 [[테오도시우스 왕조|테오도시우스 황실]]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6살이라는 어린 나이탓에 황제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으로서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이러한 시기 동게르만계 반달족의 왕 [[군데리크]]는 대규모 부족들을 이끌고 정착할 땅을 찾아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히스파니아 속주에 도달하고도 이들이 남하를 계속하자 서로마 제국은 이란계 알란족 및 서고트족과 연합해 이들에게 맞섰지만 422년 '''타라코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반달족은 히스파니아 속주 깊숙히 진입했다. 또한 반달족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여 서지중해를 장악했다. 서지중해의 무역로가 반달족의 통제 아래 들어가면서 당시 해군이 없았던 서로마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반달족이 히스파니아 남부를 점령하자 갈리시아 부근에 정착한 서게르만계 [[수에비|수에비족]] 또한 서로마 제국 휘하의 도시를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야만족들이 제국의 영토를 서서히 잠식해나가는 악재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의 정치는 극심한 혼란상태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참칭제 요안네스의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아에티우스와 보나파키우스 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어린 황제의 섭정이었던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는 요안네스 측에서 복무한 [[아에티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보나파키우스를 지원했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편지와 소문이 돌자 당시 [[카르타고]]에 있었던 보나파키우스를 라벤나의 궁정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이를 자신을 살해할 음모로 여긴 보나파키우스가 응하지 않으면서 서로마 궁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시기츠불트 장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고 이에 보나파키우스는 429년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를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이면서 전쟁의 양상은 혼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보나파키우스는 카르타고를 잃고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지만 극적으로 서로마 궁정과 보나파키우스 사이의 오해가[* 보나파키우스가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참칭할 것이라는 소문.] 아에티우스의 음모임이 밝혀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끌어들인 반달족[*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심하게 엇갈려서 상세한 것을 알기 어려운 형편이다. 동로마 제국 측의 기록에서는 보니파키우스가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이세리크를 초청하여 반달족을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서로마 제국 측의 기록에서는 이런 묘사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일설에는 이미 북아프리카 속주와 서로마 황제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만한 기록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가이세리크가 당시의 어수선한 정황을 틈타 거의 모든 반달족들을 거느리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은 서로마 제국에 있어 큰 위험요소들 중 하나였기에 430년 갈라 플라키디아는 보나파키우스에게 반달족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칼라마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고 반달족이 속주 깊숙히 진격하자 보나파키우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히포 레기우스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430년 5월에서 7월까지 이어진 2개월 동안의 공성전 끝에 포위가 풀리자 보니파키우스는 지원군을 이끌고 온 아스파르 장군과 함께 반달족에 맞섰지만 또다시 패배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쫒겨났고, 마침내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여 14개월에 걸친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켰다.[* 당시 이곳에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위대한 성자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성전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인 8월에 사망했다.]('''히포 레기우스 공방전''') 이처럼 반달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가이세리크는 435년 2월, 당시 서로마 제국의 군사적 실권자였던 [[아에티우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를 통해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의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그 댓가로 매년마다 서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칠 것을 합의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후네리크]]를 서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냈다. 439년 10월,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제국과 맺었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는 마침내 북아프리카 속주의 핵심도시이자 중요한 항구였던 [[카르타고]]를 공격했으며 이를 점령했다.('''카르타고 공방전''') 이후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속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카르타고를 차지한 가이세리크는 이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식과 황금을 독식하게 되었다. 반달족은 주요 항구도시들을 통해 지중해 진출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고 가이세리크는 이후로 강력한 함대를 양성하여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해양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가이세리크가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이자 중요한 세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 속주를 빼앗아 버리면서 반달족은 서로마 제국에게 수출되던 식량을 통제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곡물과 재정의 부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가이세리크의 북아프리카 정복'''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를 잃었지만 정치는 여전히 암투의 연속이었는데,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는 북아프리카 상실로 신임을 크게 잃은 아에티우스 대신 보나파키우스를 서로마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가 보나파키우스를 선제 공격하면서 또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보나파키우스는 432년 라벤나 근교의 아르미니움([[리미니]])에서 아에티우스를 격파했지만 전투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인해 3개월만에 죽었다.('''아르미니움 전투''') 뒤이어 세바스티아누스가 전권을 잡았지만 훈족의 왕 루아의 지원을 받은 아에티우스가 세바스티아누스를 몰아내고 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보호자 노릇을 하면서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436년 갈리아로 진격한 아에티우스는 동게르만계 [[부르군트족]]의 왕 군다케르를 무찌르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다음해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부르군트를 재침공해 20,000여 명의 부르군트족을 살해했다. 그리고 아에티우스는 436년에서 438년까지 히스파니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에비족 그리고 서고트족과 전쟁을 벌였다. 아에티우스는 대승을 거두며 막대한 군사적 성과를 이뤘으나,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서고트족의 반격으로 서로마군이 참패하고 총지휘관이었던 리토리우스가 전사하면서 전선이 무너지자 아에티우스가 급히 복귀하여 서고트족을 다시 격파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부근에 정착시켰고, 알란족을 노르망디 부근에 정착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을 괴롭히던 이민족들의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하고자 계속해서 노력했다. 442년,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는 또다시 서로마 제국과 평화조약을 채결했다. 가이세리크는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속령 두 군데를 서로마 제국에 돌려주는 대신 반달 왕국을 선포하고 그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와 약혼을 맺었다. 한편, '''바가우다이[* 서기 3세기의 위기때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준동한 농민 반란군.]의 준동'''으로 히스파니아 속주가 또다시 공격받자 443년 군대를 파병해 이들을 진압했고 여세를 몰아 아에티우스는 계속해서 세력을 불리는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 추가적인 군대를 파견했다. 446년에는 서고트족까지 공격했지만 이들의 반격으로 크게 패배했다. 447년 갈리아 서북부의 아모리카에서 바가우다이가 대대적으로 봉기했지만 알란족의 왕 고어와 서로마군이 연합하여 바가우다이는 진압되었다. 이어서 449년에 히스파니아에서 또다시 바가우다이가 준동했고, 사라고사와 타라조나 등 히스파니아 동북부를 파괴하고 점령했다. 그리고 수에비족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진격했고 서로마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450년엔 아에티우스가 [[프랑크]]족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면서 갈리아의 종주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했지만 이는 서로마 제국과 국경선을 마주보고 있는 훈족의 경계를 받기에 충분했다. 5세기 중반에 이르자 게르만 부족들을 평정한 훈족의 세력권이 서로마 제국의 국경선에 다다랐고 결국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호노리아 황녀의 청혼[* 호노리아 曰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주겠다."''' --매국노가 따로없다--]을 빌미로 [[갈리아]]와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제1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갈리아의 오를레앙까지 진격했고, 제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군했다.] 서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침공때 갈리아의 중심지인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내주면서 무력하게 무너지는가 했지만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 연합군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면서 일시적으로 침공이 주춤해졌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물리쳤지만 서로마군도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고 친 로마파인 서고트족도 왕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서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극심했기에 이듬해인 452년, 아틸라의 이탈리아 북부 침공때 서로마 제국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 침공군은 아퀼레이아를 불태우는 등 여러 도시를 파괴했지만, 아틸라가 당시 교황인 [[레오 1세(교황)|레오 1세]]와 담판을 벌여 결국 철수했다. 아에티우스는 대 훈족 전쟁의 승리자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455년 3월, 혹여나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로 당대의 로마 원로원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스스로 오른팔을 자른 격이라고 비난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곧이어 황제 역시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뒤를 이어 서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 내부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 [[파일:Genseric_sacking_rome_456.jpg|width=600]] || '''가이세리크에 의한 반달족의 로마 약탈(455년)'''[* 19세기 경 러시아의 화가인 카를 브률로프(Karl Briullov)의 그림이다. 좌측의 검은 말을 타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가이세리크이다. 중앙에는 서로마 제국의 황후와 황녀들, 우측에는 로마 교황인 레오 1세가 그려져 있다.] 아에티우스도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죽자, [[반달 왕국]]의 왕 [[가이세리크]]는 이 기회를 노려 [[로마 약탈]]을 계획했다.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전에 평화조약의 조건이었던 후네리크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 사이의 약혼이 무산되었으니, 평화조약 또한 무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455년 6월 2일, 함대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의 [[로마]]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고는 2주에 걸쳐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써 가이세리크는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1세]]에 이어 제정 시기 로마를 약탈한 두 번째 야만족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던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 참고로 동시대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 트라키안|레오 1세]]가 공존했다.]는 가이세리크와 협상을 시도했고, 그 결과 가이세리크는 저항하지 않는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숨긴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건물에 방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한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인 에우도키아 · 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당초의 약속에 따라 후네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인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가이세리크는 결혼을 핑계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참금]]을 뜯어내어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에우도키아의 여동생 플라키디아는 후에 다시 서로마 제국으로 귀환했다.] 이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로마를 탈출하려 하다가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